세계 유일의 기록을 갖고 있는 남자
KBO최초 은퇴시즌에 골든 글러브를 받은 사나이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 선수입니다.
1. 이대호 선수의 학생시절
추신수 선수와 이대호 선수는 같은 수영 초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모 프로그램에 나온 추신수 선수는 이대호 선수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본인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요 .
학교에 전학온 추신수는 자기 반에 고등학교 선수가 있다고 야구부 선수에게 알렸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야구부 감독은 꼭 데러오라고 했고 이 선수는 커서 한국야구의 레전드 이대호 선수가 됩니다.
이때 당시의 감독이 정장식 감독인데 이대호의 야구부 가입을 위해 이대호의 가족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이대호의 친척들이 지원을 해주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대호 선수는 추신수 선수가 롯데 박정태 선수의 조카로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부러움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당시 박정태 선수와 더불어 자주 수영초등학교를 찾아왔던 박계원 감독이 이대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물심양면으로 이대호 선수가 야구를 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현재의 모습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 유격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대호 선수의 야구인생은 대동중학교 신종세 감독을 만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신 감독은 이대호 선수를 직접 스카우트 해오면서 본인 집에서 2년 6개월 간 지내게 하면서 투수 또는 포수로 지내면서 여느 아마추어 선수들과 비슷하게 투타겸업을 합니다.
이대호의 가능성을 본 여러 감독들의 도움으로 이대호 선수는 야구명문 경남고로 진학하게 되었고 경남고 4번타자를 도맡으며 세계청소년 선수권 대표로도 뛰게 됩니다.
이후 이대호 선수는 2001년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롯데의 지명을 받게 되는데요. 1라운드에서 추신수 선수가 지명되었으나 해외로 진출하게 되면서 1라운드와 다름 없는 대우를 받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듯이 이대호 선수가 지명 당시에는 투수로 지명이 되었는데요. 하지만 구속이 다른 투수와 비교했을 때 빠르지도 않았고 어깨 부상까지 겹치면서 타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이 당시 경남고 코치였던 이종운 감독은 권두조 롯데 타격 코치에게 이대호는 타격에 잠재력이 많은 선수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면서 2군 감독이었던 우용득 감독이 이대호 선수를 타자로 전향하는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권두조 코치는 이대호 선수에게 리배티응ㄹ 시켰는데 타격 연습을 하지 않았던 선수가 담장을 뻥뻥 넘기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대호 선수의 첫 1군 데뷔는 좋지는 않았는데요. 2001년 막바지에 그당시 외국인 타자였던 펠릭스 호세 선수가 그 유명한 '헤이 영수 돈 두댓' 사건으로 인해 8경기 징계를 받게 되면서 대타로 콜업되게 됩니다.
마산에서 삼성라이온즈와의 데뷔전을 치뤘으며 데뷔전 다음 경기에서 첫 안타를 신고합니다. 2001년 1군 6경기에 출전하여 8타수 4안타로 5할 타율을 보였으나 표본이 너무 적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2002년에는 정식감독이 된 우용득 감독이 신인이었던 이대호 선수를 4번 타자로 기용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15연패로 우용득 감독이 경질되기 시작하면서 롯데의 암흑기가 시작됩니다.
롯데 팬이라면 치를 떠는 감독 중 한 명인 백인천 감독입니다.
이승엽을 키워냈다고 평가를 받는 백인천 감독은 삼성 감독의 시절을 지나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던 당시 롯데의 감독으로 오게 됩니다.
본인의 타격 이론을 너무 믿었던 탓인지 그 당시 잘하고 있던 선수들의 타격폼을 바꾸는가 하면 바뀌지 않는 선수에게는 벤치에 박아두기도 하는 등 롯데의 타자들의 폼을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2002년 시즌 포기를 선언하면서 타자 체질을 바꿔야 한다며 이대호 선수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킨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대호 선수는 쪼그려 뛰기와 오리걸음을 하면서 무릎에 부상이 오게 되었고 그 후 게속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2003년은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했고, 2004~2005년에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는데요. 이대호 선수가 유명해진 것은 2006년부터입니다. 1984년 트리플 크라운이었던 이만수 선수 이후로 2년 만에 타율, 타점, 홈런 1위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때 1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았으나 팀이 7위기도 했고 타고투저 시절이라 26개의 기록으로 홈런왕을 달성하여 크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고 류현진 선수도 투수부문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한국시리즈 MVP를 받으면서 이대호 선수의 트리플 크라운은 저평가를 받게되기도 했습니다.
이대호 선수에게는 모르시는 분들도 많은 비공식 기록 2번의 사직구장 장외홈런이 있는데요. 이 장외홈런이 처음으로 나온 해가 2007년입니다.
이때는 거의 대호 자이언츠라고 불리기도 했고 거의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라고 할만큼 이대호 선수만 거르면 된다는 타선이었습니다.
2008년에는 팀이 비밀번호 시절을 끝내며 데뷔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을 가지만 아주 짧은 가을야구였으며 이때 있었던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군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베이징 때는 이승엽 선수보다는 이대호 선수가 타율도 좋고 장타도 많이 쳤지만 준결승, 결승에서의 이승엽 선수의 활약으로 인해 약간 묻힌 감이 있습니다.
이대호 선수의 커리어 하이 시즌 2010년에는 무려 타격 7관왕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기록은 127경기 493타수 174안타, 타율 3할 6푼 4리, 44홈런, 133타점, 99득점, 출루율 4할4푼4리, 장타율 6할6푼7리로 도루를 제외하고 모든 상을 휩쓸었습니다.
이 해에는 이대호 선수가 KBO MVP를 거머쥐었고 시상식에는 이대호 선수를 부른 다음 MVP 트로피를 포함한 총 8개의 트로피를 받게 됩니다.
KBO에서 거의 모든 상을 휩쓸며 최고의 타자가 된 이대호 선수는 연봉 조정에서도 누가봐도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 봤으나 롯데는 팀 내 최다 실책과 팀 성적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이대호 선수가 제시한 7억이 아닌 6억 3천만 원을 제시하게 됩니다. 연봉조정위원회에서도 결국 롯데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서 롯데는 7천만 원 때문에 이대호가 실상 내년 FA에서 의리를 지킬지 의문이었죠.
2011년 이대호 선수는 커리어 4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됩니다. 이 때의 타율은 3할 5푼 7리로 오른손 타자 최초 타격왕 2연패를 하게 됩니다.
이대호 선수는 이때 FA자격이 신청되어 롯데와 협상을 결렬하고 오릭스 버팔로즈와 2년 총액 7억엔으로 계약합니다.
이때부터 이대호 선수의 해외 기록이 시작되는데요. 첫해부터 NPB에서 OPS 1위를 달성하고 팀내에서 득점, 도루를 제외하고 모든 부문이 1등이었는데요. 거의 롯데의 이대호와 여덟난장이를 재현한 모습이었습니다.
첫해부터 퍼시픽리그 베스트9 1루수에 선정이 되면서 이대호 선수는 일본 리그에 완벽 적응하게 됩니다.
2013년에도 오릭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이대호는 FA자격을 얻어 소프트뱅크로 이적하게 되면서 커리어상 처음으로 정규시즌 우승을 하게 됩니다. 롯데에서는 꿈도 꾸지못했던 우승 경력이죠.
다음해 2년 연속 우승을 하게 된 소프트 뱅크에서 이대호 선수는 16타수 8안타 2홈런 8타점을 기록했고 5차전까지 결승타 3개를 쳤습니다. 결승에서는 2홈런을 치게 되면서 한국인 최초 일본시리즈 MVP를 달성하게 됩니다.
같은 해 열린 WBC 프리미어 12 도쿄대첩에서 9회 역전 적시타를 치면서 한국이 이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는데요. 대회 베스트 11 지명타자로도 선정되기도 합니다.
성공적인 일본 커리어를 마친 이대호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프링캠프 초청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으로 아무리 잘해봐야 플래툰, 아니면 백업 대타로 밖에 뛰지 못하는 계약이었습니다.
시범경기에서 괜찮은 기록을 보였던 이대호 선수는 결국 최종 25인 로스터에 포함되면서 전반기에 타율 2할 8푼 8리로 메이저리그 첫해 치고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후반기의 타율 부진으로 많이 깎아먹기는 했으나 플래툰 계약 때문에 들쭉날쭉한 경기 기용은 그의 경기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타자가 세계 최고 리그에서 평균의 성적을 올렸다는 아쉬운 팬들의 소리도 있던 해였습니다.
다음해에는 이대호 선수가 국내로 돌아오면서 4년 총액 150억으로 그당시 최고 금액으로 롯데에 복귀하게 됩니다.
이대호가 돌아온 2017년 롯데는 정규시즌 3위로 5년 만에 포스트시즌을 진출하였으나 경험부족으로 인해 빠르게 탈락했습니다.
이해에 5번째 골든글러브를 받은 적이 있으나 외국인 선수 수상을 하는 것이 좋지 않았던지 성적이 좋았던 외국인 선수들을 주지 않고 받은 상이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후 3년 간 이대호 선수는 기대에 약간 못 미치는 성적이었으나 나이를 감안했을 때는 좋은 성적이었으며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면서 체력적인 부담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롯데에서도 이대호 선수를 대체할 선수도 없었으며 거의 이대호 선수가 롯데 타선을 이끌어갔다고 해도 과언일 만큼 팀 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도맡아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작년에는 이대호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해였는데요. KBO는 2번째 은퇴투어를 계획했으나 여러 팬들이 이대호 선수가 은퇴투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대호 선수도 은퇴 투어를 고사하게 됩니다.
이전 2번째 은퇴투어를 하려고 했던 박용택 선수가 팬들이 국가대표에서 활약하지 못했다며 은퇴투어에 반대를 하면서 고사했던 사건이 이때 영향을 끼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승엽과 추신수가 이대호가 아니면 도대체 KBO에서 누가 은퇴투어를 할 수 있나라고 하면서 힘을 실어주게 되면서 결국 KBO에서 은퇴투어를 하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은퇴시즌인 2022년 3할 3푼 1리에 101타점, 23홈런을 찍으면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됩니다. 은퇴 시즌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사상 첫 선수가 됩니다. 거기다 역대 최고령 골든글러브 수상이었습니다.
그해 한국프로야구 OB모임인 일구회에서 개최하는 일구상 시상식에서 KBO 최대 안타와 한국인 최초 일본시리즈 MVP, 국가대표 통산 ops, 타점 1위로 대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성공적인 야구 인생을 마친 이대호 선수는 이제는 우리가 자주보는 TV의 예능으로, 또는 해설위원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올해 이대호 선수가 WBC 해설위원으로 데뷔하게 되면서 곧 야구 중계에서 이대호 선수의 목소리를 들을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자 이대호 선수의 이야기. 앞으로의 야구 인생을 응원합니다.